완전함과 충만함이란 아이러니하게도 미숙함의 다른 표현이다.
현실에서 멀어질수록, 세계의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할수록 세상은 단순하고 명쾌하게 보인다. 문제는 세상을 그렇게 단순하게 파악할 때에만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반대로 완전함과 충만함을 내려놓은 사람에게 행복은 없다.
니체는 여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충고했다.
"만약 네가 영혼의 평화와 행복을 원한다면, 믿어라. 다만 네가 진리의 사도가 되려 한다면, 질문하라."
나는 '아 역시 당연한 것은 없어.'라는 말을 자주 한다. 당연한 것이라고 치부된 것 중에 당연하지 않은 모습이 드러나 당황케 할 때가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런 현상은 우리가 알고 있는 '당연한 상식'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돈이 실체라던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낮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의 이유 같은 것 말이다.
니체는 그의 책 <도덕의 계보>에서 두 가지 가치 체계를 비교한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가치 체계와 그리스도교의 가치 체계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가치 체계는 '좋음'과 '나쁨'으로 구분했다. 쉽게 말해 세상에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다.
그리고 자유인들은 주인으로서 '좋음'을 추구했다. 그들에게 요구된 덕목은 '주체성, 강인함, 자유, 스스로 주인이 되는 것 등이었다. 그리고 좋지 못한 사람들, 즉 노예로서 요구된 덕목은 '순종, 복종, 겸손, 절제. 그들은 노예답게 행동할 때가 도덕적인 것이었다.
니체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의 가치 체계는 노예의 도덕에서부터 기인한다. 이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예의 관점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노예는 지금 어떤 마음 상태일까? 그들은 증오심에 가득 차 있다. 약하고 무능력한 노예들은 현실적으로는 현재의 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대신 정신적인 측면에서 복수를 꿈꾸게 된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나, 상상 속에서는 모든 것을 전복시킬 수 있으니까. 그래서 그들은 인위적인 도덕 체계를 고안하게 된다.
노예들은 다음과 같은 문장을 상상해낸다. '주인은 악하다.' 이것이 그들의 도덕관의 시작이다. 이제 노예들의 머릿속에서 주인은 탐욕스럽고 음란하며 신을 거역하는 죄 많은 존재로 변신한다. 주인이 악이라면 노예인 자신은 무엇인가? 당연히 선이다. 이제 자신에게 강요되었던 덕목들의 가치는 변신한다. 나약함의 상징이었던 순종과 복종, 겸손과 절제는 이제 선한 자의 덕목으로 그 가치가 상승하는 것이다.
가치는 전복된다. 주인의 '좋음'은 '악'으로, 노예의 '나쁨'은 '선'으로 뒤바뀐다.
이런 일은 실제 역사에서 발생했다. 고대 그리스 정신은 고대 로마로 이어졌다. 당시의 로마는 유럽사회의 점령자로서 주인이었다. 반면 유다인들은 로마의 식민지 노예였다. 오랜 기간 동안 노예 상태로 지배받았던 무력감은 결국 유다인들의 영혼 속에 지워지지 않는 원한과 증오를 남겼다. 그리고 그러한 원한과 증오는 형이상학적인 개념으로 정립되면서 새로운 도덕 체계로 탄생한다. 문제는 유다인의 가치 체계가 그리스도교로 이어졌다는 데 있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교가 유럽 전체로 퍼져나가면서, 노예의 도덕은 오늘날 유럽인의 도덕 체계로 자리 잡게 되었다.
니체의 평가가 과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우리는 연단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순종과 복종을 말하고 겸손과 절제를 강조하는 사람들의 감춰지지 않는 분노를 실제로 본다. 흥미롭게도 그들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그들은 무엇인가 거대한 것을 등에 업으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신을 말하고, 애국을 말하고 도덕과 올바름을 말하는 사람들.
우리는 의심해야 한다. 왜 그들이 지금 내 앞에서 신에 대한 순종을 말하는지, 왜 국가에 대한 복종을 말하는지, 왜 나에게 겸손하고 절제하는 도덕적인 삶을 살라고 강조하는지. 그러한 강요를 통해 도대체 자신은 무엇을 얻고 싶어 하는 것인지를 의심의 눈으로 직시해야 한다.
(책. 열한 계단 102-107p)
진리는 당연한 것에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또 왜? 라는 질문으로 깊이가 더해진다.
가짜 뉴스 속에서 진실을 찾기 위해서는 왜?라는 질문이 필요하다.
왜 그 뉴스가 생겨났는지
그 뉴스는 왜 퍼지게 되었는지
나는 그 뉴스를 왜 믿게 되었는지
누가 왜 그 뉴스를 퍼트리고 싶었는지
...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는 것. 그 이상으로 그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져본다. 필자는 왜 이런 글을 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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